선교소식

탄자니아 - 윤봉석/순희 선교사
선교팀   2017-11-21 12:42:39 PM

언약의 편지 2017-11-15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 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 이니라(사 43;19-20)

 

저희 가족은 오랜만에 한국에서 사계절을 즐기면서 풍요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내 주성이는 처음 3달은 한국 학교의 정서와 주변적응 분위기에 적응 하려던 부작용인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결 하려다가 순식간에 불어난 몸 무게를 방과 후 지역아동 보호 센터에서 저녁 8시 30분까지 보내면서 정상의 몸 무게로 돌아 왔지만 한국의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한국의 진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사실 저도 한국의 진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암치료 후 이 주일은 부작용으로 오는 고통과 통증으로 허둥지둥 보내고 또 한주간은 다음 항암을 대비해 체력 보강의 차원으로 운동량 부족으로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투쟁하다시피 먹으며 한 주간을 보내고 다시 항암 치료 차 병원으로 가는 길은 마치 소가 도살장 가는 기분 이랄까요!!   정말 어느 때는 한국에 내가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안식월을 하러 왔는데….십팔년을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로 받은 고통이 부족해서 또 다시 암덩어리와 싸워야 하고 통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 시간이 내가 싫고 원망스러워 통곡을 하면서 벽을 친 적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사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항암 치료 과정과 실패 과정에 비하면 저는 마치 초보 유치원 과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오는 고통과 통증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봅니다.  “믿음 없는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저 땅과 저 백성을 향한 은혜와 사랑으로 저를 다시 한 번 인쳐 달라고, 기름 부어 달라고” 눈물로 엎드립니다.

그리 깊지 않은 절벽이지만 저의 의지와 상관 없이 서게 된 절벽이라 때로는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라는 직분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은혜의 관계로 많은 위로와 격려, 또한 냉장고에 맛있는 사철 음식이 마르지 않게 채워주시고, 다용도실에는 떨어지지 않는 사철의 과일들, 원룸에서 생활하는데 음식 냄새에 민감한 저를 위해 급하지도 않은 월세집을 얻어 주시고 월세 걱정 말라는 한마디 남기시고 선교지로 돌아가신 노년의 선배선교사님, 선교지에서도 성실과 충성으로 리더의 자리를 감당하고 있는 엘리샤, 그리고 스텝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래도 그 동안 사역의 열매가 아주 없는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위로를 받습니다.  또한 이웃 선교사님들은 수시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역지의 저희의 빈자리를 지극 정성으로 나의 사역처럼 감당해 주셔서 이 모든 것이 벼랑 끝에 선 저희들에게 주신 은혜이며 든든한 밧줄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강하게 단단히 벼랑에 떨어지지 않도록, 침몰하지 않도록 매어 주고 있는 또 하나의 밧줄은 산림 농업 중,고등학교입니다.  제자 훈련으로 20년, 아프리카 선교사로 24년, 그 무엇에 이끌리고 밀리고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며 지금까지 앞만 바라 보고 달려 온 길입니다.  언약의 편지 답게 표현하자면 믿음으로 달려 온 길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저의 여정을 돌아 보면 아주 많은 부분 모순으로 얼키고 설킨 실타레 같은 모양입니다.   

 

1988년 보츠와나 사역을 시작하면서 생긴 하나의 의문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답을 찾고자 3년을 깊은 수렁 가운데서 얻은 해답은 “그의 나라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아내로 시작해 자녀 그리고 교회)의 관계, 그리고 그의 의는 십자가의 의” 이렇게 잘 도 정리가 되는 듯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아이들의 신앙은 전무하다 시피하고 아내 서선교사는 제가 조금만 언성이 높아도 긴장을 하고 가슴이 뜁니다.  어느 부분은 사역자 혹은 많은 선교사님이 동의 하는 부분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어쨌든 저 스스로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달리는 길을 멈추고 근본 뿌리를 치유 하고 회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또한 탄자니아 현 정부는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 기반이 약한 지역 세무서는 선교사가 하는 사립학교를 타겟으로 삼는 듯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물을 둘러보고 수 백만실링의 세금을 때리고 이유도 없이 명분도 없이 그냥 학생 숫자에 따라 수 백만실링의 세금을 매기고 갑니다.  현실적으로 현지에서 아무리 전문 교육 이라지만, 새롭게 학교 사역을 시작 하기에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건강도 다시 한번 말라리아 장티푸스에 심하게 걸린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고…… 앞서 썼듯이 24년을 아프리카에서 부르심에 순종해서 사역을 감당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등으로….

조금씩 쌓이는 이유와 명분으로 방관자의 길을 만들어 숨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이 언약의 편지를 쓰면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성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만 죄에서, 실수에서,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성도의 신분으로 살지만 이 세가지는 하나의 얼키고 설킨 둥그런 실타래가 되는 것이 성도의 여정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이 푸는 데로 풀리어서 겸손이 하나의 장갑이 되고 모자가 되고 옷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그 실타레가 풀리는 때 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불안정한 현실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춘다는 것은 방관자의 길을 택한 것이라 생각되고, 제자훈련을 하면서 늘 했던 말 배우고 익히고 알았던 것에 충실 하라는 말에 모순과 부정에 스스로 빠지는 것 같아 용납이 안됩니다. 

 

아프리카는 아무리 큰 도시라도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의 모든 마을은 부족 중심의 지역 공동체 사회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축과 농업 중심의 경제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구는 약 2-3천명 많으면 6-7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종교는 강한 영향력으로 지역사회의 중심이 됩니다.  여기서 좀 배우고 잔 재주가 있고 말을 조리 있게 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완장을 차든 안 차던 간에 리더 반열에 중심에 서게 됩니다.  산림 농업중,고등학교에는 바로 작은 지역사회를 이끌어갈 작은 자도자들을 양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도 시대의 흐름으로 흘러 가고 있습니다.  옆에 굶주린 이웃이 있지만 그 이웃은 최신 스마트폰으로, 혹은 아무리 깊은 산속에서 살고 가난해도 저가 핸드폰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비록 작은 지역사회 작은 지도자라지만 지역사회의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알고 한발 앞선 미래를 제시 할 수 있는 리더쉅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유치원부터) 사역(cdp= 어린이 개발사역)을 통해 양육 되고 선발 된 아이들(12세)을 산림 농업 중,고등학교로 연결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전원 기숙사에 머물면서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기반으로 기존의 교육도 하지만 그 교육 가운데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6년을 하면 보통 학생의 17세가 됩니다.  2년을 전문 교육으로 신학을 포함한 농업개발과 산림과 목공전문훈련을 하면 훈련생은 19세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분야별 인턴쉽을 4년하면 훈련생 나이는 23-25세가 됩니다.  이렇게 약 20년을 중점적으로 주입 된 훈련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섬기는 리더쉽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분야별 전문인 지도자로 양성 됩니다.

 

산림 농업 중,고등학교 설립을 위해 첫 관문으로 지역 교육부를 방문하는 정문으로 들어 가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아니 싫었기 보다는 두려웠습니다.  이 땅에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공무원이고 그 중에 교사들인데 또 이들을 만나 머리 싸움으로 이리재고 저리재고, 장군 멍군, 인내와 절제, 짧은 현지어로 장단 맞추어야 하고, 단순 복잡한 현지인들의 인간관계의 담을 넘으려 하니두럽고 떨려서 지역교육부 정문이 마치 여리고 성처럼 보여서 몇 번을 교육부 건물을 돌다가, 그만 아버지 이것 안 하면 안됩니까? 아버지~~~ 운전대에 엎드렸습니다.  순간 예전에 묵었던 교회 예배실 정면에 써져 있던 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 주문을 외우 듯이 하고 교육부 건물로 들어 갔습니다.  역시 거칠게 거머리 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에 거의 포기 상태에 있던 제게 저희 지역 교육부 코디네이터가 와서 행정을 맡아 주어 한 고비 넘겼지만 농장의 농지를 학교부지로 농지변경을 하는데 담당 직원이 천문학적인 재정을 요구하여 마음이 무겁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가진 차 중에서 가장 멀쩡한 차를 팔려고 종이에 쓰고 있는데 그것을 보시고 저희 집을 방문했던 여 선교사님 한 분이 토지 변경을 할 수 있는 큰 재정을 헌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토지변경이 나왔고 건축 허가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항암 치료라는 암초를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암초라고 했지만 저의 건강은 암 치료 받기 전보다 더 좋아 졌습니다.

학교 건축을 위해서 약속된 재정은 전무하지만 회복된 저의 건강을 보면 어떤 역사를 이루어 가실지 기대가 됩니다.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1.     저희가 성령에 늘 충만하며 건강히 맡기신 사역 잘 감당할 수 있기를.

2.     주영, 주광, 주성이가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수종 드는 종들로 살아가기를.

3.     두 가정이 함게 동역을 하겠다고 가려고 하는데 많은 시험이 있을 줄 압니다.  잘 이겨내고 홍해를 건너듯이 가는 선교지에 저들을 통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4.     산림 농업 중고등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주님께서 친히 맡으시고 지역사회와 정부의 협력하에 순조롭게 진행 되기를.

5.     선교지의 스탭들과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용사들로 잘 자라기를.

 

많은 분들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직접 오셔서 또는 전화로 천천히 몇 개월 더 회복하고 선교지로 돌아가라는 염려의 마음을 전하셨으나 오랫동안 비워둔 선교지를 향한 마음에 12월28일자로 들어 가고자 합니다.   어떤 후유증없이 더 건강히 맡은 사역을 잘 감당 할 수 있기를 기도 부탁 드립니다.

마음을 나누고 싶은 열정에 너무 길게 선교편지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산에서 항암 치료를 받느라 긴 시간 한국에 있으면서도 뵙지 못하고 가는 것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주님의 은혜안에서 늘 강건하시고 평안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 드리며

윤 봉석, 서 순희 드립니다.

 

The item will be permanently deleted and cannot be recovered. Are you s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