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소식

인도네시아 - 김ㅎㄱ/ㅅㅇ 선교사
선교팀   2016-11-19 04:44:00 PM

안녕하세요~ 저희 가정을 위해 기ㄷ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평안을 전합니다. 

 
저희 가정이 이땅을 품고 온지도 어느덧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1년간의 삶을 동역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글 잘(?) 쓰는 아내가 기ㄷ편지를 대신해 간단하게 적어보았습니다. 
 
파일명은 사역보고서지만, 보시면 너무 무겁지 않은 내용임을 아실수 있으실겁니다. ^^
 
귀한 시간 내주셔서 함께 읽어주시고 앞으로도 저희 가정과 이 땅을 위해서 지속적인 관심과 기ㄷ 부탁드리겠습니다.
 
귀한 주ㄴ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한해의 마지막 되시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11월 인도네시아 말랑에서 김ㅎㄱ&김ㅅㅇ, ㅎㅇㅈㅂㄹ 가정 올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 25:13)
 
 
인도네시아 이야기
_김ㅎㄱ,ㅅㅇ 견습선교사
 
 
슬라맛 다땅!(어서오세요) 요란했던 첫 인사.
 
2016년 10월 6일.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디딘지도 어느덧 1년입니다. 이민가방 여덟 개를 카트 3개에 나눠싣고도 모자라 등에 메고 어깨에 걸친 채, 천방지축 촐랑대던 세 아이와 갓 백일이 지난 막둥이를 안고, 40도를 웃도는 발리공항을 40분을 걸어야 했던 그날은, 이제 어느덧 1년 전 첫날의 무용담(?)으로 남았습니다.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흥분감에 내달리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게이트를 얼굴 정면으로 들이박으며, 선임선교사님과 요란했던 첫인사를 나누었던 셋째도 제법 철(협상과 회유가 통하는?)이 들어갑니다. 비록 넷째 녀석이 그 뒤를 붕어빵처럼 잇고 있지만.
 
어릴 적 제가 살던 동네는 산동네 무허가촌이었습니다. 그것도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제일 꼭대기에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저희집이 있었습니다. 장마 때면 천정에서 비가 뚝뚝 떨어졌고, 바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갈 때면 여섯 살 저는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습니다.
낡아버린 문틈 사이사이에 깜깜한 정적이 내려앉을 때면 ‘사사삭, 사사삭’ 고요함을 깨는 녀석들이 등장했습니다. 어른 손가락 두 개만한 바퀴벌레였습니다. 그것도 날아다니는. 녀석들은 착륙도 어찌나 못하는지, 몰래 내려와 차라리 숨어버리면 좋겠는데, 퍽-퍽! 온몸을 땅에 곤두박질쳐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번의 장마와 몇 번의 혹독했던 겨울을 보내고, 강산이 바뀐다는 시간을 나며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선교지에 가게 될 훈련이 되겠구나!’ 쓰러져가는 무허가집도, 재래식 화장실도, 기겁하게 큰 바퀴벌레도, 이불속 콧등까지 시려왔던 추위도. 오지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그.런.데.
이 곳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이노무 곤충들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 2주는 개미가 나오는 꿈만 줄창 꾸어댔으니까요. 그도 그럴것이 집안 구석구석, 담벼락이며, 방바닥이며, 뒤뜰에도, 부엌에도 눈을 이리 돌리고, 몸을 저리 비켜도 개미, 개미, 개미가 줄을 지어 기어다닙니다. 약치는 시기가 지났다 싶으면 컵에도, 그릇에도, 수저에도 물건만 들었다 하면 개미입니다.
찾아오는 종류도 다양한데, 아얍이라는 나무를 갉아먹는 개미부터 손톱만한 왕개미, 까만 집개미, 흰개미, 붉은개미…. 각양각색 개미들이 출몰합니다. 이제 셋째 놈은 개미가 나타나면 득달같이 달려가 맨발로 밟고 섭니다.
개미뿐인가요. 계절별로 방문하는 곤충들도 어찌나 다양한지. 손가락 세마디는 족히 되는 시커먼 민달팽이도 우기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요, 막내놈 발바닥만한 박쥐도 자주 찾는 객입니다.
겉에서 볼 땐 로망이던 잔디밭 뒤뜰이 바글바글 흰개미 밭이라는 걸 안 순간, 뒤뜰은 로망은커녕 절망이 되었고, 멋모르고 바깥에 보관한 쌀이 온통 개미와 쌀벌레가 투성이가 되었을 땐 얼마나 기겁했던지요. 벽마다 몇 마리씩 붙어있는 찍짝(도마뱀)이 고마운 친구로 여겨짐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렇듯 우리를 반겨준 건 대부분 다리가 많이 달린 놈들이었는데, 요란한 첫인사의 마지막 대미는 바로 녀석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제 막 기기 시작한 막둥이가 놀이매트를 기어다니다 뭔가 먹고 있기에 얼른 뺏어보니, 입자가 거친 검은 흙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애들이 바깥에서 묻혀온 것도 아닐테고,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그날 밤, 홀로 소파에 앉아 말씀을 듣다 눈을 들었는데, 스스슥-! 소파옆 아래를 검은 물체가 지나갑니다! 쥐, 쥐, 쥐다!!!
순간 얼음이 됐습니다. 애들이 깰까 소리도 못지르고, 부들부들 소파 옆 전화기를 찾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쥐… 쥐가… 나타났어…”
마당에서 쥐를 봐도 자빠질 판에 집안에… 쥐가 들어오다니… 그것도 내 옆을 스스슥- 지나가다니…. 그랬습니다. 보람이가 먹은 건 바로 그날 새벽에 싸놓은 따뜻한 쥐똥이었습니다. 더 팔짝 뛸 노릇은 이놈에 쥐가 수납장 밑으로 분명히 들어갔는데, 신랑이 총채로 아무리 휘둘러도 나오질 않습니다. 전등을 비춰 수납장, 냉장고 밑을 다 살펴봐도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신랑은 정말 쥐가 맞냐며, 잘못 본 거라고 들어가 자라는데, 아, 그 긴 꼬리가 생각나 도저히 잘 수가 없습니다. 1시간은 식탁 위에 올라가 수납장 밑만 노려보았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소파와 냉장고, 수납장을 들어내니 쥐똥이 그득합니다.
아, 며칠을 이놈과 한 공간에서 동거동락 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그것도 여전히 찾지 못했는데…. 한동안은 쥐가 지나간 자리는 딛지도 않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후로도 녀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던 것처럼 어느 쥐구멍을 찾아 나갔는지, 따뜻한 냉장고 뒤를 좋아한다는데, 그 어디쯤서 낑겨 못나온 채 썩고 있는건 아닌지.(제발 기우이기를) 새벽마다 냉장고 뒤에서 알 수 없는 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면 저의 기우는 한층 더 깊어지고 맙니다.
녀석과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잘못 봤다던 신랑도 드디어 부엌에서 이리저리 팔딱이는 쥐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빗자루 들고 홀로 부엌으로 들어간 신랑의 괴성에 쥐가 놀래 기절할 지경이었지만요. 결국 이웃에 사시는 선교사님 두 분을 모시고 온 후에야 빗자루로 때려잡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녀석들은 지붕 위를 운동장 삼아 뛰놀고, 온갖 구명과 벽을 타고 방문해주시고 있습니다. 흔적만 남겨놓은 채.
 
 
그래, 여기는 인도네시아!
 
6개월 이상 비어있던 집이라 이곳저곳 손볼 것들이 많았습니다. 모기장도 새로 달아야하고, 비가 새는 곳도 보수해야 하고, 인터넷도 설치해야 했지요. 그런데 인부아저씨들이 다음날 아침 8시에 오겠다고 철썩같이 약속을 해놓고도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깜깜 무소식입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서야 겨우 와서는 이번엔 재료를 안가지고 와서 다시 돌아갑니다.
인도네시아는 이틀 걸린다 하면 이주 걸리고, 이주 걸린다하면 두 달 걸리는 나라라더니 참으로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느긋했고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창 2개에 모기장을 치는데 넉넉잡아 1시간이면 될 것을, 창문 크기 하나 재고 쉬고, 모기장 하나 자르고 쉬고, 이렇게 4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다른 일은 하나도 못한 채 돌아갑니다. 일감이 아니라 일당으로 지불해야 하기도 하거니와 곁에서 보노라면 이미 가슴팍에 참을 인(忍)이 댓번은 쓰여 집니다.
그나마도 일 잘하는 뚜깡(기술자)과 제대로 된 재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설치한지 채 하루도 안 된 모기장 문이 너덜거리고, 이주일 걸려 보수한 구멍은 여전히 비가 새고, 새로 산 선풍기는 나흘만에 회전이 안 되고, 어느 날은 멀쩡해보이던 수도가 터지고, 새로 산 안경은 일주일이 되자 다리가 덜렁덜렁거립니다.
뚜깡을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부르는 동안 이제는 비가 새도, 회전이 안 돼도, 음식에 개미가 기어다녀도, 모기장이 너덜거리도 괜찮은 하루하루가 지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밥통과 세탁기를, 에어컨과 전자렌지(전력이 낮아 넷 중 하나라도 함께 돌리면 전기가 나갑니다)를 함께 돌리지 않고, 30리터의 제한된 온수로 여섯 식구가 샤워를 하고(처음엔 꼴찌로 씻는 막내 녀석만 찬물신세가 되곤 했지요), 샤워 후에는 밥을 하지 않으며(전기로 온수를 데우느라 역시 전기가 나갑니다), 쌀벌레 정도는 기꺼이 먹어주고, 그릇에 기어다니는 개미를, 다리를 올라타는 거미를 자연스레 손가락으로 쓰윽 치우고나면 그만인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렇듯 적응하다 싶다가도, 식당이든 차안이든 가리지 않고 숨을 턱턱 막아오는 담배연기처럼 여전히 난처한 상황들이 튀어나오곤 하는데, 하루는 말랑 외곽으로 잠시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지쳐 잠이 들고,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탓인지 길이 꽤나 막혔습니다. 그러다 그만 오토바이를 피한다고 차선위반을 하였는데,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신랑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경찰은 면허증을 요구했습니다.
“오토바이 피하려고 잠깐, 1초정도 옆차선에 들어갔다 나온 거예요.”
어눌한 말로 이리저리 얘기해봅니다. 경찰은 웃으면서도 신랑을 초소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빨간딱지 하나를 끊어줍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빨간딱지는 경찰의 명령에 불응했을 때 주로 끊어주는 딱지랍니다. 아니 친절하게 웃으며 빨간딱지를 끊어주다니! 그마저도 은행에서 납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법원에 출두해서 거기서 재판(?)을 받고 판사가 일러주는 액수대로 벌금을 내야한다고요… 차선하나 위반했다고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한다니… 뒷통수가 뜨거워졌습니다.
남편이 그런일을 당하자 다른 선교사님들이 겁을 주십니다. 새벽같이 가도, 하루종일 기다리다 판사가 이름을 안 부르면 다음날 또 가야하고, 판사는 오전 11시만 되도 자기 맘대로 퇴근해버려 허탕치기가 일쑤랍니다.
이곳에 가면 한국에서처럼 변명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Maaf(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한답니다. 무엇보다 보통 경찰들이 요구하는 건, 돈. 차량을 잡는 이유가 딱지를 떼고, 벌금을 물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뒷돈을 챙기고 너그럽게 보내주는 것이 일반화된 자연스런 문화라고 합니다. 때문에 대부분 면허증에 5만 루피아 정도를 넣어두고, 면허증을 요구하면 이 자리에서 벌금을 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며 은근슬쩍 돈을 건넨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벌금이 아니고 뒷돈이라는.
저희는 헷깔리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로 와서 이들의 문화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어도, 1시간씩 걸리는 법원을 다녀오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나 하나라도 법대로 지켜야하는가.
위반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겠으나, 어딜가도 초행길인 이곳에서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솔직히 저희도 그 이후 한번 면허증에 넣어둔 돈을 경찰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돈을 받은 경찰은 모르는 길을 매우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었지요.
그런데, 몸은 편한데 선교사로서의 마음은 영 편치가 않습니다.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길,외롭고 어렵더라도 예ㅅ님이 그러하셨듯 그 길이 저희가 걸어가야 할 길이겠지요.
 
 
사는 게 선ㄱ라구요?!
 
‘사는 게 선ㄱ다’ 이곳에 오기 전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그만큼 현지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힘들고, ‘잘 사는 것’부터가 선교의 시작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제 나름대로 적응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곤 했습니다.
 
막내 녀석은 이곳에서 누나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걸 경험케 했습니다. 고만고만 녀석들 셋 챙기느라 소파에서,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한번은 어른 허리까지 오는 유모차에서 곤두박칠 치기도 했는데, 마룻바닥도 아닌 타일바닥에 퍽-하고 애 머리박는 소리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그뿐인가요, 요로감염부터 중이염, 농가진, 계란알레르기, 수두까지 갖가지 병들을 순서대로 앓고나니.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 검색하느라 반 돌팔이 의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농가진에는 발라선 안 된다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주는가 하면, 24개월 이상만 쓰는 약을 주니 믿음이 쉬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동네의원에선 의사가 직접 절구에다 알약을 갈아주는데, 안 씻은지 몇 년은 되보이는 절구를 찌든 돈들과 같은 서랍에 넣어놓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곤 그 약을 차마 먹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중이염이 의심돼 소아과에 가 귀 좀 봐달라니 집에서 쓰는 큼지막한 손전등을 들고 와 어찌나 당황했던지요.
문화의 차이일수 있지만, 이곳은 제일 비싸고 좋다는 소아과도 귀보고 목보는 기본적인 검사를 해주지 않습니다. 코와 귀를 보는 기계도 전문 이비인후과가 아니면 없거니와 목이 아프다는대도 청진기만 대고 눈만 봐서 하는 진찰이 여전히 미심쩍기만 합니다.
믿고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집근처 병원이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유치원에 다닌지 석달 쯤 되었을까요. 하루는 둘째아이와 침대에 누웠는데,
“나 내일 유치원 가기 싫어”
아침이면 늘상 가기 싫어, 안갈래, 달래고, 윽박지르며 실갱이를 벌여오던 터였습니다.
“왜 가기 싫어?”
“친구들이 못생겼다고 안 놀아준단 말이야. 혼자 놀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마음속에 담아주었던 말들을 토해내며 엉엉 울어대는 다섯 살 아이.
아이들을 현지 유치원에 보내며 가장 걱정했던 아이가 둘째 녀석입니다. 위아래도 치이기도 하거니와 녀석의 기질이 워낙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언니와 동생이 엄마 양편을 차지하고 나면 엄마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누었던 아이. 칭찬 한마디에 날개가 달리는 아이였습니다.
말이 통하지도 않는 친구들과 온종일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역일지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려왔습니다. ‘친구들이 실은 예람이를 엄청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힘들고 외로울 땐 하ㄴ님이 옆에 계시니 기도하라’고 달래주며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던 녀석 머리에 엄지손톱만한 원형탈모가 생겼습니다. 엄마의 윽박지름을, 온종일 말도 안 통하는 답답한 곳에 갇혀있음을, 이 아이는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사는 게 선교구나. 너와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내는 것부터가 선교구나.”
 
얼마 전입니다. 7월에 이곳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맏딸에게 잠자리에 누워 물었습니다.
“오늘은 누구하고 놀았어?”
별 생각없이 물은 묻음에 충격적인 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무하고도 안 놀았어. 친구들이 나랑 안 놀아줘.”
“왜? 왜 안 놀아줘?”
“몰라. 내가 멘토스도 줬는데, 멘토스만 먹고 나랑 안 놀아줘.”
“그랬구나. 너가 먼저 놀자고 해보지.”
“내가 가서 ‘melakukan apa?(뭐하니?)’라고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자기들끼리만 논단 말이야. (아이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나는 인기도 없고, 친구들이 다 나 싫어해. 엉엉”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씩씩하게 인사하며 학교에 가는 아이였기에, 가기 싫단 얘기를 한적 없는 아이었기에, 잘 다니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현지학교의 교육방침이 우리의 생각과 맞지 않아도, 온종일 답과 틀이 정해져 있는 사각형 교실에 앉아 우리나라 80년대 주입식 교육처럼 아이들 머릿속에 답을 밀어 넣고만 있는 현실에도,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만다린(중국어), 자와어(자와섬 언어) 5개국어를 해야 하는 상황에도, 학교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_이곳 화교들의 교육열은 한국의 열혈 엄마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학교 입학 전부터 영어회화는 기본이고, 주산과 피아노, 발레 등 아이들을 학원으로 돌립니다. 알파벳도 모른 채 들어갔던 하람이에게 영어로 된 문장부터 시작하니 쫓아가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저희는 아이들을 책상에만 앉혀 공부만 시키고 싶지는 않기에,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지 계속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하교하는 하람이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물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하고 놀았어?” “응, 오늘은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았어”
“그래? 뭐하고 놀았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엄마 아빠 놀이”
“그랬구나. 엄마는 누구야?” “리첼”
“아빠는?” “캐시”
“아기는?” “게비”
“그럼 너는 뭐했어?”
“음… 난 아무것도 안했어. 그냥 친구들 노는 거랑 물건이랑 지켜줬어.”
“아…”
남자아이들이 짖궂게 괴롭히니 그로부터 친구와 물건을 지켜줬다며, 아이는 신나 이야기 하는데, 제 마음은 어제보다 더 아려옵니다. 이게 정말 아이들과 함께 논 것인지, 그냥 혼자 아이들과 놀고 싶은 마음에 투명인간처럼 곁을 맴돌며 지켜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습니다.
워낙 나눠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이기도 하지만, 선물받은 마이쥬 한봉지를 학교에 가져가 하루 만에 친구들에게 몽땅 나눠주고 온 데에는 주고픈 마음과 함께 사랑받고픈 마음, 친구들에게 관심 받고픈 마음이 함께 담겨있었겠지요. 혹여나 이것이 ‘내가 무엇을 주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으로 아이의 대인관계에 자리잡지 않을까, 아이의 자존감이 상처입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기우이길 바라봅니다.
“하ㄴ님, 학교에서 친구들이 저랑 많이 안 놀아주지만 하ㄴ님이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시고, 마음에서 저랑 놀아주시니 감사해요.”
오늘 저녁, 하람이의 기도에 오히려 제가 위로받습니다.
“그래, 사는 게 선교다. 잘 살아내는 것부터가 선교의 시작이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선교이리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처음 이곳에 와서 길도 모르거니와 운전도 할 수 없어서 두어 달 정도 운전기사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소리안또 아저씨. 인도네시아 고유의 구릿빚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웃는 인상이 선했던 분이었습니다. 차를 탈 때면 인도네시아 말로 아이들에게 숫자를 알려주고, 주람이를 늘 두 팔 벌려 안아 차에 태우고 내려주었지요. 당신도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며 종종 핸드폰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수라바야 한인교회에 성탄절 행사가 있어 갔는데, 우리가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동안 내내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아저씨 생각에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습니다.
성탄절에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한인교회에서 모신 마음도 감사했지만, 예ㅅ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그 날에, 우리들끼리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실은 이곳이 아니라, 소리안또 아저씨 옆이 아닐까 하는(이것은 아직 사역을 시작하지 않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이미 사역을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은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현지분들과 시간을 보내셨거나, 보내실 것이었으니까요). 죄송한 마음에 교회에서 받아온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아저씨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작은 성탄절 선물이라고.
다음날 아침, 아저씨가 작은 검은 봉다리 하나를 건넵니다. 잘 구워진 아얌깐풍이었습니다. 아얌깐풍은 시골에서 키우는 닭으로, 작고 살도 많진 않지만 맛이 좋아 이곳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격도 더 비싼 닭입니다.
그 닭 한마리를 검은 봉다리에 담아 1시간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져왔을 아저씨. 당신이 생각한 제일 맛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고 싶었을 그 마음. 이미 식어버린 그 닭을 저는 차마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운전기사로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에게 운전기사를 좀 더 오래 고용할 의사를 묻곤 하셨는데, 우리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정중히 거절해야 했지요. 그렇게 한해가 저물며 아저씨와의 계약도 끝나고, 만남도 끊어졌습니다. 아주 가끔 염소풀을 오토바이 한가득 싣고 들르는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여전히 선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악수를 청하셨지요.
그러던 몇 달 전, 아저씨의 젊은 부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족히 열 살은 어린 둘째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신장이 안 좋았다 합니다. 그러다 이 주전 죽었다고. 늘 따뜻하게 웃어주시던 아저씨의 선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말이라도 통하면 전화라도 할 텐데, 모셔서 따뜻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마음처럼 쉬이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몇 주 뒤, 동네 어귀에 힘없이 앉아있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갔지만, 얼굴은 초췌했고 두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일까, 아들은 잘 지낼까, 아저씨는… 아저씨는 어떤 하루를 보내시는 걸까… 차창 밖으로 저무는 회색빛 하늘이 유난히 쓸쓸해보였습니다.
 
어느 시골교회 목ㅅ님이 인터넷에
‘목ㅅ 사용 설명서’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럴 때는 전화하세요>_목사 사용 설명서
1. 보일러가 고장나면 전화합니다.
2.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전화합니다.
3. 냉장고, 전기가 고장나면 전화합니다.
4, 휴대폰이나 집전화가 안되면 전화합니다.
5.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쓸 일이 있으면 전화합니다.
6. 농번기에 일손을 못 구할 때 전화합니다.
7.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울 때 도움을 청합니다.
8. 몸이 아프면 이것저것 생각말고 바로 전화합니다.
9, 갑자기 병원에 갈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합니다.
10. 경로당에서 고스톱 칠 때 짝 안 맞으면 전화합니다.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그래, 이게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야!’ 이들에게, 이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기뻐도, 슬퍼도, 아파도,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곳, 머물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그런 큰(?)바람과 다르게 첫해의 훈련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잠잠히 기다림’이었습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내 눈으로 보기에 만족스럽고, 인정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는 훈련이랄까요. 특히 늘 회사에서 뭔가를 계획하고, 움직이고, 이뤄오던 신랑은 이 시간을 꽤나 어려워했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잃은 거 같다고 할까요.
하ㄴ님은 내가 이루는 일들로 내가 존귀하다 말씀하시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는 내가 이룬 일들로 하ㄴ님께, 가족에게, 후원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빨리 현장에 뛰어들어 뭔가 계획하고, 이루고, 열매를 보고 싶은. 내 가슴 속 깊이 숨어있는, ‘내가 이루었소’ 하고 결과를 보고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숨어있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만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 주권을 내려놓는 시간. 하ㄴ님과 잠잠히 걷는 시간. 그리고 비로소 내가 아닌 하ㄴ님이 드러나는 시간.
마태ㅂ음에서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ㅅ께 절하며 “진실로 하ㄴ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 삶을 보고, 우리가, 내 삶이, 내 간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ㄴ님이 드러나시는 것. 사람들이 “진실로 하ㄴ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케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우리 삶의 마지막 결론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는 게 선ㄱ다’라는 말에 숨어있는 뜻이겠지요.
우리의 기준으로 더 많은 사람, 더 큰 장소, 더 큰 영향이 아닌, 지금 내 자리, 나의 일상에서 만나게 하시는 한 사람을 보려합니다.
그들의 일상에 나를 포개고,
안고, 업고 오토바이 한 대에 온가족이 낑겨타곤, 길 위를 달리는 다섯 식구의 삶을 짐작해보는 일, 오래된 트럭에 상처난 귤들을 잔득 싣고 길가에 앉아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엄마와 어린딸의 긴 하루를 가늠해보는 일, 길가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며 구걸하는 이들의 차가운 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 그들의 하루에 나를 그려넣고, 하ㄴ님을 그려넣으며, 때로는 말을 걸고, 과일을 사고, 마음속 기ㄷ를 하는 일들이 즐겁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소리안또 아저씨와 그의 어린 아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ㅅ님이 내게 주셨던 선물을 그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 기ㄷ제목
1. 하ㄴ님과의 관계가 모든 것에 1순위가 되게 하소서. 가족의 건강과 안전, 평안 그 모든 것들보다 하ㄴ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하ㄴ님을 먼저 구하는 자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리ㅅ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가 아닌 하ㄴ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2. 하ㄴ님이 가라 하시는 곳에 가고, 하ㄴ님이 눈물 흘리는 땅에 머물게 하소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게 하소서.
기아대책의 비전은 떡과 복ㅇ입니다. 한손에는 떡을, 한손에는 복ㅇ을 들고 가는 것. 복ㅇ은 누구에게나 절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떡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3. 아이들이 학업과 친구관계 속에서 잘 적응하게 하소서. 대인관계에 상처받을 수 있지만, 또한 치유하시는 하ㄴ님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4. 자카르타 바수끼(아혹) 주시자가 더욱 지혜롭고 담대한 하ㄴ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소서.
자카르타 주지사 바수끼(화교출신 기독교인)가 내년 2월에 있을 주지사 유세 중 코란을 인용한 연설을 하였는데, 무슬림들은 “비무슬림이 코란을 거론한 것은 신성모독”이라 하여 자카르타와 수라바야, 말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실상은 종교갈등처럼 비춰지지만, 바수끼 주지사 시절 이전부터 뇌물을 받아왔던 부패한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바수끼 주지사 재임이후 뇌물을 못 받게 되면서 그의 재선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일부러 종교갈등을 부추기는 양상이 더 큽니다. 이미 자카르타는 폭력시위로 번지도 하였는데, 이것이 지난 98년 자카르타학살때와 같은 종교(이슬람,기독교)와 인종(화교, 현지인도네시안)간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또, 바수끼 주지사와 같은 기독교 정치인들에게 지혜와 담대함을 주셔서 이 나라를 올바른 정의가 통치하는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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